▲ 정 연 탁

-약력-

안의한의원 원장

푸른산내들 대표

시인

전) 대전대학교 한의과 대학 교수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대한민국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나아가 세계 민주 시민이라면 어찌 이 날을 잊을 수 있으랴. 두 눈 벌겋게 뜨고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국민들의 충격, 세계 시민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국가적 아픔과 같이하려고 거창에서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거창군 대책위를 만들었다. 그리고, 4.16 세월호 참사 5일 후부터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단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오라고 기원했다. 또 마지막 한 주검이라도 집으로 돌아오길 기원하고 기원했다.

그날 이후, 지난 11월 중순까지 218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저녁 7시에서 8시까지 한 시간, 거창군청 앞 로터리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이면 단 한 주도 빠짐없이 촛불문화제를 열어 왔다. 안산분향소와 팽목항도 직접 가서 아픔을 같이 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끝까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실종자 마지막 단 한명이 가족 품에 돌아올 때까지,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거창의 촛불을 들 것이라고...

그 약속을 지키려 하루 이틀 들다보니 오래 들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앞 교도소 문제로 지역 문제가 급박하게 돌아가게 되어, 매일 들던 촛불은 내리고 한 달에 한 번 매달 16일을 세월호의 날로 정해 촛불을 이어가고 있다.

경남이라는 낮은 정치 수준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이런 촛불 하나 든다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만큼 내면의 변화도 조금씩이나마 일어날 것이다. 촛불을 들고나서 돌아가는 모습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는 듯이 걸음걸이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쩌면 촛불을 들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의 폭력에 대해 비록 소극적일지라도 이렇게 촛불을 밝히며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곁눈질로 보고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들 앞에 직접 어려운 문제나 부당한 일을 당하면 그들도 촛불을 들거나 자신의 권익을 지켜내기 위해 저항을 조직할 것이다.

큰 수확이라면 이 고장의 지나친 보수성으로 인해 고향 자체를 등졌던 출향민들의 마음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향임에도 보수성에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보수적인 가족을 설득하기에도 너무 지쳤다고 했다. 민주적 변화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런 출향민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의 꾸준한 촛불에 대해, 이리저리 소식도 듣고 직접 와서 보고는, 자신의 고향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전에는 가능하면 고향에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자주 와서 지역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해야겠다고 했다.

조금 지쳤다 싶을 때가 되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같이 촛불을 들어주었다. 자신의 귀중한 휴가 여행 여정을 아예 이곳을 경유하게 잡았다. 와서 촛불을 함께 들고 차도 같이 마셨다. 하루 밤 자고가기도 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인들도 이쪽을 지나갈 때는 꼭 촛불을 들러 왔다.

어떤 이들은 촛불에 쓰이는 여러 가지 소품을 보내왔다. 촛불 기금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세월호를 상징하는 배지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노란 우산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알림글을 제대로 알려달라고 게시판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작은 소책자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노란 목걸이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드려야겠다. 여기저기서 내미는 손들이 고마웠다. 그들로 인해 우리 거창촛불은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위안을 받았다. 서로의 손을 내밀고 손을 맞잡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대의 손길들이 그리 따스할 수가 없었다. 빠져가는 기운에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이런 지역 움직임과는 달리 전국 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게 진행되고 있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다 되어가도 그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자꾸만 커져만 가고 있다. 어렵사리 만들어진 세월호특별법, 그것도 유가족이나 시민들이 요구한 수사권도 기소권도 없는 절름발이 법인데도, 그것마저도 다시 권한을 대폭 축소한 정부의 세월호특별법 정부시행령을 보면, 지금 국가권력을 장악한 정부에게는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을지 자꾸 회의가 든다.

현재 드러난 대로만 보더라도, 세월호참사가 해상사고임에 분명해 보인다. 그것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진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사고 후 구조 수습과정은 별개이다.

그것은 분명 국가의 책무이다. 어딘가 쓰일지 모르면서도 많은 세금을 국민들이 말없이 내는 것도 바로 국가 권력에 대한 믿음이다. 그 국가 권력이 제 때에 사고와 사건으로부터 국민을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고 발생 후에는 제때 구조해 줄 것이라는, 사후 수습을 잘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국가권력의 대처 방식은 한심하기까지 하다.

기억은 글자가 아니다. 언어가 아니다. 어떤 상이다. 이미지다. 이미지 덩어리다. 이미지들이 엉키거나 흩어져서 때로 뭉텅이로, 때로 모래알로 변화한다. 우리의 기억은 그 이미지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소통한다. 단지 언어는 그 이미지를 상징하고 분류하고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한번 각인된 기억은 이미지 덩어리로 뭉쳐 있다가 제대로 수습된다면 서서히 바람에 풍화하듯 희석되어 간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더욱 눈덩이처럼 커져가서 한 개인이나 한 사회나 한 국가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만다. 애석하게도 세월호참사 경우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가 저런 국가의 태만을 보고만 있다면, 내일의 우리가 그 희생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세월호 참사 규명을 위해 끝임 없이 노력해야 할 중요한 이유이다.

그럼 이런 규명 운동을 위한 거창의 현재적 모습은 어떠할 수 있을까. 그리 거창하게 잡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거창에서 현재할 수 있는 실질적 실천 모습은 세월호의 날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여기저기 규명을 위한 노력을 지지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사람이든 자금이든 연대해 나가는 것이다. 기억의 퇴행에 묻히지 않도록 잊지 않는 것이다.

한 지인의 말을 빌리면, 봄은 가슴으로 왔는데 눈에는 슬픔이 차오른다. 세월호 참사만 생각하기만 하면 눈물이 저절로 가슴을 가득 채운다. 가슴에 찾아온 봄이 새로운 세상을 향한 환희로 가득 찰 날은 언제 즈음 올까. 그날이 하루 속히 왔으면 좋겠다.

이 기회를 통해 지면으로나마 거창 촛불과 함께 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하지만 또 부탁 드린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세월호의날 문화제는 진행됩니다. 매달 16일 7시, 거창군청 앞 민주광장에서 꼭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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