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의 다양한 삶과 존재방식을 형상해온 소설가 박종윤이 오랜 공백을 깨고 네 번째 소설집 『진딧물의 미로』가 출간했다.

6년 만에 펴낸 이 소설집에는 수록된 표제작 「진딧물의 미로」를 비롯해 「마지막 교신」 「지렁이의 춤」 「슬픈 아프리카」 「아버지의 중국집」 「이스탄불 이스탄불」 「라이카의 별」 「직지, 흥덕사의 검은 나비」 「회한(悔恨)의 노래」 등 8편의 단편들이 수록됐는데 모두 지난(至難)한 작가적 체험으로부터 출발한다.

박종윤은 이 책에서 주어진 상황은 각기 다르지만 인물들이 견뎌야 하는 모욕과 불안을 응시한다. 그의 소설에는 공통적으로 누군가의 무례와 결례로 상처받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소모품으로 이용만 당하다 팽개쳐지는 운명에 처해 있다. 주어진 사회의 규범에 따르기 위해 자신의 인격을 서비스 상품으로 내놓지만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고 조직 밖으로 내쫓기고 만다는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박종윤의 소재 취사력은 거의 천의무봉한 경지이다. 여기서의 ‘천의무봉’은 아무런 결점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수많은 미흡과 부실을 각오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서사의 진행을 위해서라면 어떤 ‘꾸밈새’도 멀찌감치 밀어내고 있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재래적인 산뜻한 결말, 도식적인 교훈, 인물의 유형화, 만남과 헤어짐에 따르는 우연의 남발 같은 소설적 기교를 적극적으로 사양하는 박종윤의 이야기들은 기왕의 소설적 문법을 꼭 반쯤 비틀어 놓고 있다.

그의 이런 소설관의 정체를 벗겨 보자면 어차피 그만의 서사 진행에 동원하는 아우라를 새겨가며 읽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 ‘풀어가기’에서 보이는 박종윤의 독보적인 해학은 읽어갈수록 점입가경의 경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어떤 대목을 인용하더라도 나무랄 데가 없을테지만, 특히나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한번쯤 곱씹어 볼만하다.

「마지막 교신」에서 무신론자인 아버지는 기관사 출신인 자신의 이력이 과학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걸핏하면 과학이란 단어를 쇠뼈다귀 우려먹듯 곧잘 인용했다. ‘무신론자’라는 허풍스런 과장어도 빛이 나고, 어려운 단어도 아닌 ‘과학’을 일부러 두 번씩 들먹이는 속셈도 확실히 짚여오며, 굳이 ‘인용’이라고 반 이상 부적절한 어휘를 골라 집어넣음으로써 해학을 조장하는 것이다.

특히 박종윤의 소설에는 의외로 술술 읽히는 힘이 배어 있다. 이 속도감의 근원을 요약하기는 쉽다. 우선 이야기를 풀어가는 원동력인 ‘과거지사’가 워낙 풍성해서 그것을 적재적소에 안배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므로 사소한 ‘세목’따위는 무시해버린다. 일컬어 스토리텔러적 관점인 것이다. 기왕의 소설 일반이 관행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주요인물의 얼굴과 버릇과 입성 따위에 대한 시시콜콜한 묘사가 박종윤의 지문에는 거의 안 보인다.

그런 자잘한 ‘세목=정보’가 이야기의 진행을 방해하는 사례를 무수히 봐오고 있는데, 그와 같은 선천적/기질적 ‘특성’이 서사의 활력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한번쯤 의심해 볼만하다는 것이 박종윤 특유의 구성 감각인 것이다. 이 점은 흔히 놓치고 있지만 나름의 특이한 플롯짜기로서의 개성에 값한다고 했다.

박종윤은 나에게 소설 쓰기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 먼 길을 떠나는 작업이었다. 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일 수도 있고 내 주변 인물들이기도 하다. 개중에는 새로운 소재를 찾느라고 남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겪은 뼈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있는 관념을 끄집어내어 어떻게 다변화시키고 육하원칙에 순종하지 라는 물음 앞에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운 체념에 부딪친다고 했다.

소설가 김원우는 『진딧물의 미로』에 대한 작품 해설을 하면서 "작금의 우리 소설의 여러 장단점을 박종윤의 소설도 그대로 다 갖추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흔히 말하는 대로 남의 산의 돌이야 좋은 것도 있을 수 있고, 그보다 나쁜 돌이 더 많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들을 누가 제 보석 가꾸기에 잘 써먹느냐는 또 다른 기량 벼리기야 굳이 이 자리에서 언급할 것도 없을 터이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덧붙이건대 원래 가르치면서 반은 배운다는 옛말대로 오랜만에 박종윤의 단편들을 통독하면서 해설자도 이런저런 ‘정보’를 너무 많이 챙긴듯해서 뿌듯하기도 하다. 아무쪼록 평소의 부지런한 성정을 소설 쓰기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자기 갱신의 선수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며 응원했다.

▲ 박종윤 소설가

소설가 박종윤은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 거창에서 성장하였고 〈세기문학〉신인상에 단편소설 「바늘구멍」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한국소설가협회 기획실장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2013), 한국소설가협회 사무국장(2013), 국제 펜클럽 이사(2013)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사무국장)이며, 2009년∼현재 《천지일보》 역사칼럼 연재를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현재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수상경력으로는 한국소설문학상, 직지문학상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박종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눈내린 뒤』 『의친왕 이강』 소설집 『그 여자의 남자』(1,2) 『동녘 사랑이 머무는 곳』(공저)등에 이어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진딧물의 미로』가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김원우(소설가)「작품해설」중에서 일부 발췌. - 개미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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